옛말에 우리의 몸이 10이라면 9할이 눈이라고 했다. 그만큼 눈이 참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이 글을 보고 있는 분들도 눈이 잘 보이기 때문에 나의 글을 읽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내가 항상 힘이 들 때 생각나는 일이 있다.
때는 내가 영어 교육에 살짝 정신을 쏟을 무렵 영어체험센터란 곳에 2년간 근무할 때의 일이다. 1년간의 학사일정을 짜고 있는데 같이 근무하는 여자 선생님들께서 "올해도 특수학생들을 받을 실 건가요?"라고 건의를 하셨다. 그 말의 뜻 속에는 작년에 특수학생들을 받았으나 별다른 교육적 성과를 보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하긴 나도 그걸 왜 하는 걸까?'란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일반 학생들의 영어교육을 전문적으로 하는 곳인데 왜 매년 두 차례 정신지체와 특수장애아들을 위해 하루씩 교육을 하고 있는 게 의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생님들끼리 협의를 거치고 올해는 특수아동은 안 받는 쪽으로 결론을 지었다. 그런데 교육법과 비교해 보니 특수아동을 받는 것은 법으로 정해져 있는 사안이라 교육을 거부할 사안 자체가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특수아동을 받을 준비를 하였다. 나는 같이 근무하는 영어 원어민과 빈 주머니를 마련해서 그곳에 학용품이나 과일 등 만져보며 영어를 익히는 활동을 준비했다.
날이 밝아 노란색 특수학교 학생들이 타는 큰 버스가 도착하여 모두 마중을 나갔다. 평소에 같은 학년이 들어오는 학생들과 다르게 어른 같은 고등학생부터 유치원 생처럼 보이는 아주 작은 아이들이 앞사람 어깨에 손을 얹고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 눈이 보이지 않는구나.'
눈이 잘 보이지 않으니 앞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걷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그렇게 수업을 시작했는데 한눈에 봐도 눈이 보이지 않는 예쁘고 가녀린 아가씨가 미리 준비한 딱풀을 넣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만지면서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는 뒤돌아서서 더 이상 수업을 이어 갈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원어민이 내 대신 수업을 이어갔다. 그 여학생의 지나온 삶과 앞으로의 삶 괴로움을 느꼈기 때문일까?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렇게 특수아동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마치고 왔던 모습 그대로 노란색 버스를 타고 가는 학생들에게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잘 가라고 했던 날이 생각난다. 나는 그날 수업이 끝나고 어머니께 이유 없이 전화를 걸어 목이 메어가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나의 눈이 밝게 세상을 볼 수 있게 태어날 수 있게 해 줘 부모님께 고맙다는 마음이 정말 처음으로 들었다.
진짜 이 글을 보는 사람들께 알려주고 싶다. 세상에 고민, 걱정, 괴로움 모두 털어버리라고 눈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축복받은 인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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