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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쓰기

고마운 선생님

by 정수 티스토리 2024.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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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은 공부를 잘하는데 나는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영어와 수학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가장 점수가 안 나오는 게 영어와 수학이었다. 그 당시엔 학원이나 과외를 받을 형편도 아니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저녁 9시까지는 꼬박 학교에 있어야 했다.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생활을 하다 보니 수학 점수가 15점이 나왔다. 20점 만점이면 좋겠지만 100점 만점이니 문제였다. 정말 공부와는 인연이 없나 보다 생각 들었고 '인문계가 아닌 실업계를 갈 걸'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고 그냥 친구들과 노는 게 좋았다. 

 그렇게 2학년이 되어 처음 만난 영어선생님, 키가 무척 크셨다. 그런데 첫날부터 나를 보자마자 "니 이름이 뭐냐?"라고 물으시더니 항상 나에게 영어 지문을 읽게 하셨다. 공부에 워낙 담을 쌓고 살다 보니 뭐 말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나는 그냥 그렇게 평소처럼 그 시간에 혼나고 끝나나 보다 했다. 그런데 웬일일까 다음 영어시간에도 나를 시키셨다. 역시나 또 못 읽었다. 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분명 나의 실력을 알 텐데 또 시키셨고 못 읽었다고 뭐라고 하신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음시간에도 또 나를 시킬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친구들 마저도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안 되겠다 싶어 친한 친구들에게 단어 하나하나 뜻과 발음을 배웠다. 불안했던 예상은 딱 맞았다. 역시 또 나를 시키셨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친구들에게 배운 단어를 읽었다. 수업 후 "오늘 잘했다"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그 말 한마디의 힘이란 느껴보지 않았다면 알 수 없을 것이다. 이후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나는 또 다음 시간에 나를 시킬 것을 염두에 두고 친구들에게 물어가며 영어사전을 찾아가며 그렇게 준비를 했다. 

 그렇게 1년이란 시간을 보내고 나니 발음을 못하는 단어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아쉽게 그 선생님과 떨어졌지만 나의 영어 공부는 계속하게 되었다. 나중에 학력고사를 봤는데 영어에서 거의 만점을 받았고 원하던 대학을 잘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교사가 되어 그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었다. 어느 중학교 교감 선생님이 되어 계셨고 나와 동갑의 아드님은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너무 기뻤다. 역시 나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께서는 자녀 교육도 잘 시키셔서 좋은 의사 선생님이 되셨다니 본 적은 없지만 기분 좋았다. 그리곤 알았다. 그 선생님은 그 당시 다른 학교로 가셔야 되었는데 자녀 교육 때문에 내가 학생인 그 학교에 근무하게 된 거라고 그리고 나를 만난 것이다. 

 아마 모르실 것이다. 그 당시 선생님께서 승진을 위해 시골학교로 가셨다면 나를 못 만났고 나의 인생은 지금처럼 이렇게 글을 취미로 쓰는 직업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하루하루 힘들게 사는 직업이 아닐까 싶다. 결혼을 했을까? 그 또한 장담할 수 없다. 그때 영어 선생님은 길 잃은 인생 한 명을 살린 것과 같다. 고맙고 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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